아이들은 왜 실패하는가

이 책은 존 홀트가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근무하면서 미사시적으로 아이들을 관찰하여 기록한 관찰일기이다.

존 홀트는 교육개혁가이자 어린이들 권익 옹호에 투신한 사회 개혁가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홈스쿨의 선구자로 불리는 존 홀트.

최근 읽은 책 중 2권이나 존홀트에 대해 언급해서 searching 하였고, 그의 저작 중 아이들은 왜 실패하는가? 라는 제목에 흥미가 생겨서 읽어보게 되었다.

아이들은 왜 실패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려움과 지루함과 혼란 때문이라고 말한다.

학습에 대한 두려움, 모른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교실안에서 존재하는 압박, 지루하게 짝이 없는 수업을 강제로 들으며, 그 수업을 조용히 버티기 위해 구사하는 아이들의 전략들과 그 전략에 속는 어른들…

책에선 아이가 선생님과 함께 공부하면 뭔가를 알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에 다다르지만 혼자서 문제를 풀 때는 그것을 왜 못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선생님은 아이가 문제를 쉽게 풀 수 있도록 교구를 이용해 곱셈과 나눗셈을 알려줬지만, 결국 그것을 스스로 구상해내지 못한 아이는 혼자서 문제를 풀 때 또다시 막히게 되는 것이다. 아이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는 해답은 단 하나, 자신이 스스로 던지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다.

책에서는 지성을 가진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a와 b가 분수덧셈 문제를 풀고 있었다. 둘 다 문제의 답을 모른다. a는 나름의 생각으로 답을 내어 b에게 말했는데, b는 자신도 답을 모르지만 적어도 그 생각이 왜 답이 될 수 없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 지식이 아니라 지성을 갖게 해야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배움에 실패하지 않게 우리 아이를 키울 수 있는것인가? 무엇을 더 어찌해줘야하는가? 에 대한 생각이 드는데, 저자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후속작으로 ‘아이들은 어떻게 배우는가’ 라는 책을 지필하였으며,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고 한다. ‘아이들을 믿으라’ 이보다 간단한 것은 없다. 그렇지만 이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을 믿으려면 우선 우리 자신을 믿어야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왜 실패하는가 후에 읽고 있는 책 제목이 마인드스톰(시모어패퍼트)인데, 존 홀트의 후속작인 아이들은 어떻게 배우는가 라는 책 서문에 마인드스톰과 시모어패퍼트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렇게 또 책과 책이 연결된다.

다음은 책에서 인상깊었던 구절을 발췌한 내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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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이야기 (단어 철자를 잘 못 쓴 아이, 같은 글자도 가끔은 틀리게 가끔은 올바르게 쓰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

그 아이는 자신이 틀렸다는 건 말할 것도 없고 틀렸다고 상상하는 것 조차 견디지 못한다. 만약 자신이 틀렸을 경우(이런일은 아주 자주 있는 일이다.) 에밀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가능한 한 빨리 틀렸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 아이는 절대 자기가 틀렸다고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쁜 일이니까. 에밀리는 뭔가를 하라는 명령을 받으면 두려움에 떨며 재빨리 해치운 다음, 보다 높은 자리에 앉은 존재에게 결과물을 넘기고는 ‘틀렸다’ 혹은 ‘맞았다’라는 마법의 말이 떨어지길 기다린다. 만약 맞았다는 말이 들려오면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패서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틀렸다는 말이 들려오면 더이상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생각할 수 도 없는 지경에 빠진다.

이런 두려움은 에밀리를 또 다른 전략으로 이끈다. 이 전략은 다른 아이들에게서도 자주 발견되는 전략이다. 에밀리는 암송시간이면 교사의 주의가 스무명의 아이들에게 골고루 나눠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아이는 교사들이 주로 어리둥절해 있거나 집중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질문을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진짜로 답을 알든 모르든 마치 답을 쏟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손을 들고 흔들어 대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수업 내용을 알고 있다는 걸 내게 전할 수 있으니까. 그리하여 진짜로 답을 알든 모르든 마치 답을 쏟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손을 들고 흔들어대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수업 내용을 알고 있다는 걸 내게 전할 수 있으니까. 누군가 다른 아이가 올바른 답을 말하면 에밀리는 확실한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가끔씩 그 답에다 자기 의견을 덧붙이기도 한다. 비록 그 어조와 태도에는 위험을 무릅쓴 흔적이 역력하지만 말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적어도 대여섯명이상이 손을 들기 전까지는 절대로 그 아이가 손을 드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하는 것은 아이들이 지금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문제를 기록한 터무니없이 긴 서류들과 엉터리 심리검사서를 읽는 대신, 학교가 허용하는 한 아이들에게 말할 자유, 생각할 자유, 행동할 자유를 준 다음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관찰해야 한다.

단지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점검하기 위해서만 아이들을 관찰한다면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사실들은 모두 놓쳐버리고 말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아이들을 경험해온 수많은 교사들이 아이들의 진짜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자기 아이가 누구인지, 관심사가 무엇인지, 어떤 감정 상태인지 파악할 시간과 열성이 있기 때문에 시종일관 잘 해나갈 수 있다. 하지만 학교 교사들은 기존의 관습적인 임무, 즉 학생들을 지배하고 잡아 놓고 심판하는 일에서 스스로 자유로워져야만 그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들에게 도움이 될 방법들을 배우게 될 것이다. 무슨 특별한 의도나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교실에서 아이들끼리 얘기하고 아이들끼리 뭔가를 해보도록 허용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나는 아이들의 생각과 경험과 관심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야 교실을 아이들에게 좀 더 쓸모 있는 장소로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먼저 나를 가르친 후에야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할 수 있었던 셈이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중에 읽기 장애를 가진 아이가 있었는데 우연히 그 아이가 친구들에게 말을 좋아한다고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나는 말에 관한 책을 주면 그아이를 도와줄 수 있찌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아이가 볼 수 있는 곳에”녹원의 천사”(말이 등장하는 이야기의 책)라는 책을 가져다놓았다.예상대로 아이는 그 책을 좋아했고 그 이야기와 등장인물에 푹 빠져 읽기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의욕과 힘을 얻었다. 사실 그 아이의 ‘장애’란 글 읽는 법을 익히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것이 사실로 확인되었을 때 아이가 느꼈을 수치심이 전부였다.

내가 개인지도를 맡은 아이들 중 한명은 글을 못 읽는 일곱살짜리 남자아이였는데, 가르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고 있었다. 아이의 개인 지도를 내가 맡은 것은 그 떄문이었다. … 지금은 차라리 그 아이에게 음절이나 단어를 만들게 하고 내가 발음을 하는 쪽이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때도 가끔은 그런 방식으로 공부하기도 했었다… (중략) (아이의 패턴을 이해하여 단어를 잘 읽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완전히 말도 안되는 음절을 내뱉곤했다.) 나는 결국 사태를 이해했다. 그 아이는 글자를 볼 때 긴장하거나 집중하는 법이 없고 오히려 침착하고 호기심 어린 태도를 보였는데, 나도 그런식으로 관찰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아이는 내가 어떻게 나올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 아이의 실험용 기니피그 였던 셈이다.

이 수업은 그다지 성과가 없었다. 지금은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지만 그 때는 분명하게 알지 못했다. 그 아이는 실제로는 읽을 줄 알았고 간단한 단어를 해독할 줄도 알았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걸 원하지 않았고, 또 받아들이지 않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만약 그 시간을 아이가 읽고 싶어하는 책을 일어주거나, 그 아이에게 읽으라고 하고 모르는 단어를 물으면 대답해주는 식으로 보냈더라면, 그 아이에게나 나에게나 훨씬 유익한 시간이 되었으리라. 질문할 필요도, 설명할 필요도, 소리내어 항의할 필요도 없이

창조적인 과학자는 문제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분석한 다음 해답을 내릴 때는 재빨리 전진한다. 반면창조적이지 못한 사람은 재빨리 답을 찾으려고 아무렇게나 시도를 하는 통에 실수를 거듭하는 형향이 있다. 사실 문제와 정답이라는 것은 사물의 관계와 구조와 질서를 바라보는 상반된 방법일 뿐이다. 문제란 조각 하나가 빠진 그럼이고, 답을 바로 그 빠진 조각이다. 시간을 들여서 문제를 살펴보고, 생각하고, 파악하는 아이들은 머지 않아 답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다. 반면 문제를 정해진 출발점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최고 속도로 달리기 시작하라는 명령으로 여기는 아이들은 반드시 혼란에 빠지고 만다. 그들은 문제를 찬찬히 생각해보지도 않고 무조건 답을 향해 덤벼든다. 도대체 왜 그렇게 서두르는 것일까?

아이들은 성공과 실패의관점이 아니라 노력과 모험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한다. 성공과 실패의 날카로운 경계선은 오직 어른들을 만족시키는게 중요할 때만 나타난다.

만약 아이들 스스로 문제를 언제, 얼마나 풀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면 문제를 많이 풀어야할 때도 안도감을 느낄 수 있을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많은 양의 수학 문제를 풀게 함으로써 그들이 자신감과 안도감과 확신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일 경우가 많다. 아이들은 지겹고 불안하고 주의력이 둔해져서 점점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결국 실수하는 걸 점점 더두려워하게 된다.

이책이 나온 뒤 빌과 나의 좋은 친구가 된 로어 라스무센은 수학 시간에 아이들이 문제를 안심하고 편안하게 풀 수 있도록 다양하고 기발한 문제지를 고안해냈다. 이 여교사는 분야별로 각각의 문제지를 만들고 여러벌 복사해서 서류함에 넣어 두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책상위에 올려둔 문제지 견본을 훑어보고 풀고 싶은 문제지를 정해서 서류함에서 원하는 문제지를 가져다가 풀었다.

로어는 곧 아이들이 대개 어떤 특정한 문제지만을 고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 말해 아이들은 잘 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적어도 대여섯번 이상 같은 문제지를 반복해서 풀었다. 아이들은 마른 우물에서 물을 찾지 않는다. 이 아이들은 좋은 점수를 받거나 선생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문제지를 푼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이들 자신을 위해서 였다. 분명한 사실은 아이들은 문제지를 반복해서 풀 때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실히 하거나, 뭔가 새로운 것을 얻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문제지에 있는 개별적인 지식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는 확신이 들어야 다른 것을 시도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긴장을 줄이는 방법은 긴장의 존재를 깨닫는 것이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주는 긴장에 한계를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은 긴장이 지나친 나머지 주의를 집중하지 않고, 빈둥거리고, 모른다는 소리를 남발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늘 긴장할 필요는 없으며 필요하다면 긴장을 늦출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줘야 한다.

생각이 모자라는 아이들은 미친 듯이 답에 달려든다. 우수한 사색파들은 시간을 두고 문제를 곰곰이 살펴본다. 그것이 단순히 생각하는 기술의 차이에 불과할까? 재능과 운만 따라준다면 우리가 가르치고 훈련시킬 수 있는 테크닉의 문제일까? 안타깝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수한 사색파들이 시간을 들일 수 있는 것은 불확실성을 참을 수 있고, 알지못하는 상태를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모자라는 아이들은 알지 못하는 상태를 참을 수가 없다. 그 상태는 아이들을 공황에 빠뜨린다.

이런 현상을 틀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만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이런 두려움이 모니카 같은 아이를 심하게 짓누른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할도 똑같은 압박감을 느끼고, 때로는 나도 그렇다. 모니카만 자기 생각이 맞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다. 분명 여기에는 또 다른 불안감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답이 아예 없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다. 물론 모니카는 올바른 답을 원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모니카가 원하는 것은 하나의 답’ 이다. 그 아이는 구닥다리 같은 것잋라도 답이면 되고, 그 비슷한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짓이든 할 판이다. 일단 그것을 붙잡기만 하면 압박감의 많은 부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레이첼도 이런식이었고, 제럴드를 비롯한 다른 아이들도 전부 이랬다. 이 아이들은 해법이 없다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한다. 자신들의 해법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조차도 거기에 매달릴 만큼. 이런 확실성에 대한 광적인 집착과 해답을 모르는 질문, 해법이 없는 문제를 견뎌내지 못하는 성급함이 지성과 관련된 많은 문제의 핵심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되는 원인은 무엇인가?

만약 그 정도라면 정신과 의사가 해결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정도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인간 관계에 대해서라면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우주에 대해서는 어떤 지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꼭 그렇다고 할 수 는 없지만 가능하지는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을 학교에서 가르칠 수도 있지 않을까?

지성이 있는 아이들은 맹렬하게 삶에 몰두한다. 레이첼(레이첼의 첫째가는 관심사는 자기방어였다.), 팻,일레인, 개리는 모두 현실을 피하기 위해 백일몽에 빠진다. 하지만 바버라, 베티, 마리아, 랄프 할 같은 아이들은 삶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그 아이들은 삶을 껴안는다. 앞에서 배움과 사랑에 빠지는 것에 대해 얘기 한적이 있는데, 이 아이들은 삶과 사랑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베티, 바버라, 샘 같은 아이들은 자신들의 취미와 자기 자신들에 관한 시시콜콜한 일까지 전부 다 얘기하곤 했다. 지성있는 아이들의 행동을 보면 그들은 우주가 어떤 보편적인 법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 아이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답을 상식에 비추어서 검토한다. 반면에 다른 아이들은 답이 이치에 맞을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이치에 맞는 게 뭔지도 모르며, 검토의 요점을 모르기 때문에 검토할 방법도 모른다.

하지만 이아이들을 가르는 차이점은 그 뿌리가 훨씬 더 깊다. 우리가 ‘지성적’이라 부르는 아이들은 우주란 전혀 법칙성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라도 믿을 수 있고, 우주를 이해하지 못할 때라도 그것이 자기에게 더러운 수를 쓰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 것 같다. 이런 믿음은 “나는 신이 우주를 가지고 주사위 놀이를 할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라는 아인슈타인의 말과 그 정신에게 일맥상통한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지 1958년 6월호에 실린 ‘창조성이란 무엇인가’ 라는 기사에 다음과 같은 적절한 비유가 나온다.

창조적인 과학자는 문제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분석한 다음 해답을 내릴 때는 재빨리 전진한다. 반면 창조적이지 못한 사람은 재빨리 답을 찾으려고 아무렇게나 시도를 하는 통에 실수를 거듭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그렇다!우리는 정답파들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사실 문제와 정답이라는 것은 사물의 관계와 구조와 질서를 바라보는 상반된 방법 일 뿐이다.

생각이 모자라는 아이들은 미친듯이 답에 달려든다. 우수한 사색파들은 시간을 두고 문제를 곰곰이 살펴본다. 그것이 단순히 생각하는 기술의 차이에 불과할까? 재능과 운만 따라준다면 우리가 가르치고 훈련시킬 수 있는 테크닉의 문제일까? 안타깝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수한 사색파들이 시간을 들일 수 있는 것은 불확실성을 참을 수 있고, 알지 못하는 상태를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모자라는 아이들은 알지 못하는 상태를 참을 수가 없다. 그 상태를 아이들을 공황에 빠뜨린다.

1년 전, 나는 아이들의 두려움이 어떤 식으로 그들의 전략에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했다. 지난 1년동안의 작업은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쓰는 전략은 시종일관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방어적이었는데, 무엇보다 말썽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고, 창피, 처벌,비난, 위신 추락을 모면하는 데 집중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처음부터 방어벽을 치고, 미리 실패를 덮어서 무슨일이 일어나든 자기들이 일을 잘 처리했다고 생각하고, 설혹 잘 못했을 때라도 다른 아이들보다 더 못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게 상황을 조작하려 한다. 이제 겨우 열살인데, 많은 아이들이 관심을 두는 것을 오로지 점수 올리기이다. … 이런 식으로 자기를 제한하고, 자기 패배를 불러오는 전략들은 무엇보다 두려움의 영향이 크다. 몇년 동안 나는 어째서 지성있는 아이들이 학교에만 오면 비지성적으로 행동하는지 자문해왔다. 가장 간단한 ㄷ개답은 ‘아이들은 겁을 먹고 있다’ 라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의 패배주의가 학교에서 나쁜 성적을 받기 떄문이 아닐까 의심하곤 해싿. 그리고 “꼐속해! 넌할 수 있어!”라는 기운찬 외침을 던지면 그런 두려움을 깨끗이 없앨 수 있을 거살고 생각했다.

이제야 나는 두려움이야말로 아이들의 지성을 파괴하는 주범이요, 아이들이 세상을 보는 시각과 생각하는 방식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당면 문제가 있는 셈이다. 하나는 아이들이 겁을 먹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이 몰고 가는 나쁜 사고 습관으로부터 아이들을 떼어놓는 일이다. 무엇보다 기가막히는 것은 학교에 도대체 얼마나 큰 두려움이 팽배해 있는가 하는 것이다. … 아이들이 두려움에 적응 하는 것은 아이들의 지성과 재능에 엄청나게 파괴적인 영향을 끼친다. 전ㄹ장에서야 겁에 질린 병사가 최상의 병사일지 모르지만, 겁에 질린 학생은 언제나 가장 열등한 학생일 뿐이다.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 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어른들이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엄청난 두려움과 걱정과 긴장을 느낀다.

불안, 두려움, 긴장은 주의력과 시야의 점위를 좁히는 것 같다. … 불안이 증가하면 지각 능력의 범위가 좁아진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다.

앤디는 바보가 아니다. 호기심도 많고, 똑똑하고, 열성적이고, 지각있는 타입이다. 그런데도 앤디는 말그대로 정신을 잃을 정도로 겁이 많다. 앤디는 한 가지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넘어가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연결점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수학을 못한다. 앤디의 기억력은 배운 내용을 담아두지 못하는데 스스로 자신의 기억력을 믿지 못하는게 가장 큰 이유다. 자신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실패와 불안과 좌절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한, 그 아이에게 진정한 삶이란 없다. 어른들이 그 아이를 겁에 질리게 했다. 그것도 의식적이고, 고의적으로 그렇게 했다. 아이의 행동을 좀 더 쉽게 통제하고 아이에게서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자주 두려움과 불안을 통제의 도구로 사용하는지 알고 나니 소름이 끼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아이가 그토록 싫어하는 공부를 하돌고 만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만 한다. 내가 하는 일은 결국 일련의 벌로 변해버린다. 그것은 내가 그토록 몰아내려 애썼던 그 두려움을 불러올 뿐이다.

스스로 배우는 아이들은, 자신들의 흥미와 관심을 끄는 것을 배우기 때문에 평범하지 않거나 이상한 것을 만나도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이상하다. 그리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두고 엄청난 생각과 공상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걱정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다만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어른들이 그 배움을 통제하고 이해를 강요할 때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걱정하기 시작한다. 이해하지 못하면 머지 않아 어른들과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모어 페퍼트는 아이들이 컴퓨터를 이용해 수학적 사고의 통찰을 얻는 방법을 다룬 마인드스톰이란 책에서 반복 연습과 훈련의 차이를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자신을 위해 훈련하라. 그러면 하고자 하거나 할 필요가 있는 일을 더 잘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반복 연습하라. 그러면 그 사람이 네가 알기로 되어 있는 것을 네가 알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거나 최소한 너를 바쁘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중략) 테드는 나를 따라 뭔가 해볼 수 도 있었지만 스스로 뭔가를 시도하는 법은 없었다. 그 아이는 그 어떤 것도 자기 것으로 소화하지 못했다. 그 아이는 나눗셈을 배우기를 원치 않았고, 교실을 벗어나면 그것을 쓸 데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한 이유는 오직 나를 만족시키고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그 아이는 자기가 외우고 있는 구구단에 그 인수가 속해 있을 때는 답을 할 줄알았다. 하지만 내가 물어보지 않으면 스스로는 그렇게 해볼 생각이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냥 내버려두면 아이는 다시 낡은 체계로 되돌아갔고, 그 체계 안에서만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알았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흰 막대가 아니라 머릿소엥서 나누기를 한다는 생각이 아이들 마음에 자리 잡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내생각이지 아이들의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그 아이디어는 절실한 지적 필요와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된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조심스럽게 선택한 길잡이 질문으로 아이들의 대답을 유도하는 것은 단번에 답을 말해주는 것과는 다르다고 나 자신을 속여 왔다. 교하가 던지는 질문에 유도되어 해답을 찾는데 익숙해진 아이들은 나중에 그 질문을 기억해내거나 스스로 비슷한 질문을 해내지 못하는 한 속수무책이 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아이들은 그것을 기억 못한다는 것이다. 아이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는 해답은 단 하나, 자신이 스스로 던지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다.

이런류의 문제(여러가지 방법으로 생각도 해보고 실습도 해서 아이들이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은 일종의 ‘자기조절 학습장치’가 되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숙련이 되면 아이스스로 고난도의 프로그램을 만들어낸다. 다른 방식도 마찬가지겠지만 수학에서 이런 접근 방식을 쓰려면, 교사들은 문제를 푸는 ‘유일한’ 또는 ‘가장좋은’길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 문제를 아주 원시적이고 경험적이고 비효율적인 수준에서 다루는 아이들 역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세련된 발견만큼이나 훌륭하고, 흥미롭고, 가치있고, 격려를 받아 마땅한 발견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한다. 도로시가 길고도 고통스런 노력 끝에 모든 2의 배수는 같은 길이의 줄 2개로 나눌 수 있고, 모든 3의 배수는 같은 길이의 줄 3개로 나눌 수 있다는 걸 발견했을 때 그 아이는 놀라운 지적 도약을 이루었다. 이것은 자신의 힘으로 지수의 법칙 같은 것을 알아낸 아이들의 지적 도약에 조금도 떨어지지 않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운 법칙들을 활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법칙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현실과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Z.P 딘즈(Dienes) 교수는 자신이 ‘수학 실험’이라고 명명한 수학 교수법을 개발했다. 이 교수법은 영국 레스터셔 지방의 여러학교에서 널리 이용되었고, 내가 접했을 당시에는 다른 곳에서도 많이 쓰이고 있었다. 수학실험은 아이들에게 여러종류의 고재를 주고, 어떤 모양을 만들려면 몇개의 조각이 필요한가. 아떤 모양의 조각 몇개를 모아야 다른 모양을 만들 수 있겠는가 등등 다양한 실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은 실험이 너무 어려우면 좀 더 쉬운것에 도전하고, 답을 얻으면 그것을 써둔다. 머지않아 아이들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언젠가 했던 일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한다. 그리고 유사성을 발견하기 시작하면 어떤 법칙을 세운다.

권태와 저항은 학교를 두려움만큼이나 멍청함이 판치는 곳으로 만든다. 아이에게 학교에서 하는 종류의 일거리를 주면, 아이들은 그 일을 두려워하든, 저항하든, 지루하지만 기꺼이 하든 자신이 가진 주의력과 에너지와 지성의 일부만을 써서 그 일을 할 것이다. 한마디로 그 일을 멍청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결국 습관이 된다. 아이는 낮은 정신력을 가지고 공부하는 데 익숙해지며 이런 식으로 해낼 수 있는 전략을 개발한다. 그리고 5학년 정도가 되면 자기 스스로 멍ㄴ청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학교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은 낮은 정신력을 구사하는 것뿌닝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자기앞에 펼쳐진 현실이 자신의 내면엣거 주의와 관심과 집중, 몰두 같은 요소를 불러일으킬 때 가장 지성적이 된다. 간단히 말해 그럴 때에야 비로소 지금 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이것이 교실과 학교 공부를 가능한 한 재미있고 흥미 있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학교를 즐거운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지성적으로 행동하고 또 그렇게 하는 습관을 갖게 하기 위해서다. 학교에서 권태를몰아내야 하는 이유는 학교엥서 두려움을 몰아내야하는 이유와 같다. 권태는 아이들을 멍청하게 행동하도록 만든다. 일부러 그러는 아이들도 있는데 대부분 그 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오래 지속되면, 아이들은 뭔가를 알려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잊어버린다. 한때는 자신의 온 마음을 다 쏟고 온갖 감각을 다 동원하여 모든 것을 알려고 했는데 말이다. 아이들은 삶과 경험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잊어버린다. ‘아 알겠다. 이제 알았다. 이제할 수 있겠다!’ 라고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다.

지성은 삶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이다.

지성이란 하나의 생활방식이며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 특히 새롭고 낯설고 당혹스런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얼마나 지성적인가를 알려면 어떤일을 하는 법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할지 모를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비지성은 지성이 모자라는 상태가 아니다. 비지성은 지성과는 완전히 다른 행동양식으로, 완전히 다른 일련의 태도에서 자라나온 것이다.

똑똑한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을 여러해 동안 관찰하고 비교해보면, 그들이 아주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똑똑한 아이들은 삶과 현실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그것과 관계를 맺으려 하고, 그것을 껴안고, 그것과 자신을 조화시킨다. 그와 삶 사이에는 어떤 장벽도 어떤 장애도 없다. 둔한 아이는 호기심이 훨씬 떨어지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무엇이 실제인지에 대한 관심도 훨씬 적으며, 환상의 세계에 훨씬 더 경도되어 있다. 똑똑한 아이는 실험을 즐기고 그 실험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험해보기를 좋아한다. 그는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가지 방법만 있는게 아니라는 좌우명으로 산다. 만약 최초의 방법이 통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시도한다. 그러나 둔한 아이는 시도 자체를 두려워한다. 그런 아이는 한 번 시도해보게 만드는 데도 수없이 설득을 해야할 뿐 아니라 그 시도가 실패하면 즉시 포기해버린다.

똑똑한 아이는 끈질기다. 그는 불확실성과 실패를 견디며 대답을 얻을 때까지 도전한다. 모든 실험이 실패했을 때는 당분간은 해답을 얻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스스로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상태를 인정한다. 물론 이런 상황이 아이를 초조하게 만들 수도 있찌만 그래도 기다릴 줄 안다. 아주 흔한 일인데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말해주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미래에 스스로 풀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둔한 아이는 현재위치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완전히 안다고 생각될 떄에만 앞으로 나아간다. 앞으로의 경험이 어떤 것일지 완전히 안다는 느낌이 들지 않거나, 이미 알고 있는 경험들과 꼭 같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그 경험에 들어가길 원하지 않는다. 똑똑한 아이들은 이 우주를 전체적으로 이치에 맞고 이성적이며 믿을만한곳으로 생각하는 반면에, 둔한 아이는 이우주를 이치에 맞지 않고 예측불가능하며 믿을 수 없는 곳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둔한 아이는 새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 이외에 다른 가능성을 낙관하지 못한다.

알 수 없음의 아바타

글쓴이: 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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