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견디는 힘, 일상영성

우리에게 비전과 사명이 있지만, 매일을 푯대를 바라보며 달려가진 못한다. 길을 가다가 넘어지고 길을 잘 못들기도 하고 힘들어 주저 앉기도 하는데 이를 잘 견디어 내는데 필요한 것이 일상영성이 아닐까 싶다.

복음과 상황 2022-2월 호 글 중 칼 라너의 일상-신학단상 에 대한 글을 읽고, 기억하기 위해 기록을 해 본다.


“너의 일상이 초라해 보인다고 탓하지 말라. 풍요를 불러낼 만한 힘이 없는 너 자신을 탓하라.” – 마리아 라이너 릴케

릴케에 따르면, 인간은 고독 속에서 내면으로 침잠함으로써만 평범한 일상을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로 인식하게 된다. 릴케라 언급한 일상에 경이로워할 수 있는 시적 능력과 유사하게, 라너는 일하기와 먹기, 웃기 등 살면서 줄곧 하는 일에 삼투된 신적 은총을 발견하고 이에 놀라워하는 ‘일상의 신학’을 추구한다.

일상의 신학이라는 것이 일상을 축일 로 바꿀 수 있다고 여겨서는 안되겠다. 이런 신학이 할말이 있따면 그것은 우선 일상을 일상으로 두라는 말이다. 신앙이 드높은 생각이나 영원의 지혜로도 일상을 축일로 바꿔 놓을 수 없거니와 또 바꿔 놓아서도 안된다. 일상은 꿀도 타지 않고 미화하지도 않은 채 견디어 내야한다. 그래야만 일상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야 할 그대로 있게 된다.

칼 라너

실제 대부분 사람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로 지치고 짜증나고 상처받고 있따. 반대로 삶이 줄 수 있는 풍요로운 혜택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사람들은 일상에서 실용주의와 물질주의 외에 다른 가치를 보지 못할 위험도 있다. 이처럼 일상에 살면서 일상을 제대로 살아내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과업이다.

우리는 주일마다 일상의 사소한 일들, 별것 아닌 하찮은 일들에 부드러운 마음으로 응해야한다.

칼 라너

삶의 속도를 줄이고 숨을 돌리는 성찰적 여백에 들어설 떄, 우리는 일상이 그 속에 ‘영원한 삶’ 이라는 축제를 반영하고 있음도 발견하게 된다. 이때에야 일상은 생존을 위해 살아내야 할 무엇을 넘어서. 영원한 삶을 지금 여기서 준비하는 소중한 배움의 터가 된다. 자기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로 영원한 삶에 조건 없이 들어가듯, 나의 힘을 빼고 은혜에 자신을 내 맡김으로써만 일상 기쁨과 감사 속에서 향유할 수 있게된다.

우리는 자기를 변명하고 싶은데도, 부당한 취급을 받았는데도, 침묵을 지킨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보상도 못 받고 남들은 오히려 나의 침묵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도 남을 용서해준 적이 있는가… 우리는 순전히 양심의 내적인 명령에 따라, 아무에게도 말 못할, 아무에게도 이해 못 시킬 결단을, 완전히 혼자서, 아무도 나를 대신해 줄 수 없음을 알면서, 자신이 영영 책임져야할 결단인줄 알면서 낼니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감격의 물결도 더는 나를 떠받쳐주지 않고, 자기와 자기 삶의 충동을 더는 하느님과 혼동할 수없으며, 하느님을 사랑하면 죽을 것만 같은데도 하느님을 사랑한 적이 있는가

칼 라너

일상의 신학이 가능한 것은 일상 자체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성령을 통해 일상을 사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수행하는 여러 잡무속에서, 혹은 타자를 대하는 나의 습관적 태도에서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고 영원한 가치가 빛나는 것을 발견했다면, 우리는 모든 존재를 지탱하고 있는 은혜에 이미 잠기어 있다. 이처럼 인간은 평범한 삶 속에서 자기를 전달하는 하느님의 신비 앞에 서 있기에, 궁극적으로 라너가 제시하는 인간상은 ‘일상적 삶의 신비가’ 라고 할 수 있다.

-김진혁 일상의 결을 타고 찾아오는 은혜

last modification date 2022-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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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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