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성서적 근거를 살펴봤다.
지난시간에 이어서.. 삭개오 이야기
복음서
이 강의를 듣다보면, 생기는 의문 우리는 전도하지 않습니까?
삭개오의 회심 사건에서 우리는 향유하는 삶이 회심을 일으킨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삭개오는 여리고에 사는 사람이다. 중산층과 상류층이 사는 곳. 레위인은 예루살렘에서 일하고 여리고에 있는 집으로 퇴근한다.
삭개오는 세리이다. 세무사무실의 장. 다들 삭개오를 싫어했다. 그 이유는,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게 받치기 때문에 + 토색한다.(강탈한다. 세금을 걷는데 더 걷는다.)
그래서 창녀와 세리는 절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예수님의 별명 : 먹보와 술꾼, 죄인들의 친구‘
그랬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가 여리고에 온다고 했을 때, 여러명의 사람들이 몰렸다.
삭개오의 생각 그가 과연 나와 친구가 되어 줄까? 삭개오는 키가 작다. 그래서 나무에 올라간 -> 이 정도는 주일학교 수준 -> 여기의 핵심은 삭개오가 시선 집중 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이다.
삭개오씨 내려오세요. -> 수치를 면하게 해주자. 내가 당신의 집에서 먹고 마셔도 될까요?
이건 삭개오에게 구원이다. 삭개오랑 먹고 마시는 주님. 단지 먹고 마셨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은
삭개오. 이것을 보십시오. (가방에서 사영리를 꺼낸다.)
이렇게 해야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고 끝까지 먹고 마셨다.
그 결과 삭개오가 손을 들고 일어났다.(맹세할때 손을 든다.)
‘주님, 저의 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쓰겠습니다. 지금까지 토색한것을 4배(율법에 써있다. 도둑질한자는 4배로 갚아라)로 갚겠습니다.‘
‘jx :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이 집에 구원이 임했다.‘
여태까지 친구 하나 없을 정도로 토색한 사람에게 그와 먹고 마셨더니 이런 일이 없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요즘 이런말로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다.
최권능목사 -> 예수천당 불신지옥. 마을에서 머슴 한 명 붙잡고 얘기했다. 바빠죽겠는데, 왜 날 불러서 화나게 하나, 화가난 머슴이 야소교에 갔다가 세례 받았다. 기독교 정사 이야기.
이젠 이렇게 회심이 안된다.
한국처럼 노동강도가 높은 나라가 어디있냐고. 여기가 지옥이지.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는 거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할까?
예수 믿으니까 하루하루가 즐거워 이런거 말고 같이 힘들어 하고 같이 아파해야하는게 마땅하다.
성령 충만하면 하루하루 살아나는게 구름위를 걷는 것 같고, 직장 상사가 뭐라 해도 웃으면서 말하고.
이런게 물론.. 이렇게 사는게 나쁘진 않지만,
영적절정을 맛볼 때가 있다. 당연히 필요하다. 그래서 사경회, 수련회를 간다. 필요하다.
그러나 24시간 365일을 그렇게 살려고 하면 됩니까? “받은 은혜를 쏟아버렸어. 일상에 오니까. 역시.. 내가 부족해..” 이런게 아니라…
항상 영적절정에 들어가려고 하는건 영적 탐욕이다.
기회만 되면 사람들이 이민가고 싶어한다.
삶이 너무 각박해서. 힘들사람들이랑 나눠 먹는 것이다.
포도주가 다 떨어졌을때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요.
함께 할 사람이 없는 사람을 초대해서 같이 먹고 마시라.
집을 열고 사람을 초대하세요. 총님넨 아이 2~3 일 때까지 사람 많이 초대했다.
창조는 7일 째 안식을 창조했다. 매누하 rest quietness selebration
예수님의 비유는 다 축제하는 거다. 드라크마 찾고 축제한다.(찾은 것보다 드라크마 더들겠네..) 양 한마리 찾았어 축제하자(양 4마리는 잡아야 축제하겠네)
시편 39편 9절 축제의 함성을외칠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빛나는 …
수도사들의 복장. 베네딕트 수도사들에게 복장을 입혔는데, 천민들이 입는 옷을 입게했다. 1500년 전에 수도복 옷에 있는 끈은 수도사와 천민을 구분하는 표이다.
새로운 수도원 운동하시는 분들은 일반 평상복으로 수도복을 바꿔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수도복 입을 떄마다 => 가난 정결 순명(부르심)
성프란치스코와… 가난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겠습니다. 수도복 받을 때 맹세했다.
숙제 나는 어떤 감각에 예민한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전통적 근거
1)창조영성
영성을 주제로 나누면 창조와 구속
영성을 주제별로 분류하면, 창조영성과 구속영성으로 구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매틴퐉스?;;;; 구속영성은 죄를 강조하는, 죄가 만연하다. 에수그리스도의 구속에 방점을 두는 것이다. 창조영성은 그럼에도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성과 아름다움이 인간안에 남아 있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다.
우리의 문제점은. 두 가지 다 맞으니까 이 두 가지가 모순돼 보인다.
모순을 끌고 가는게 기독교 힘이다. 모순에서 살아가는게 기독교 인인데… 두 가지를 가지고 가려면, 끊임없이 구도자처럼 고민해야한다.
그러니 교회들에서 이 둘 중 하나를 선택 해서 설교하기도 한다.
세상이 선하지 않은데 우리가 어떻게 향유할 수 있을까? 세상의 죄성을 어떻게 감당해야하나…
세상이 악하다고 하는 사람은 향유의 영성이 어울리지 않다.
전적타락은 선한것이 아무 것도 없다 라는 뜻이 아니다. 타락의 범위가 모든 것에 미쳤다.(끼쳤다.) 라는 뜻이다. 나의 행동 말 관계 음식 사회 문화 경제 ….
하나님은 죄 보다 더 강하시다. 선한것이 아무것도 없다. 가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더 강하고 우린 그걸 믿고 포기하면 안된다.
원죄 개념. 원죄는 성경에 안나오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만든 말이다. 물론 성경적인 말이다. 삼위일체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성경적인 말이 듯이
원죄보다 원복이 먼저 있었다. original blessing 이 먼저다.
죄의 영향력을 간과하면 안되지만, 그 안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이 있다고 믿고 살아야한다.
프랑키 쉐퍼. 프란시스 쉐퍼 아들. 둘이 노선이 다르다. 프랑키 쉐퍼 ->기독교 삶은 믿는 사람이던 아니던 삶은 즐거워하고 재능을 즐거워 하는 것.
선하게 태어난 우리 -> 부녀가 같이 쓴 책. 데즈몬드 투투? 주교? 남아공주교. 남아공에 평화를 심은 노벨상 받은. 인간을 보는 방식이 달라지니 성서를 읽는 방식이 달라졌다.
죄에 대한 집착 떄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살까지 이르기도 한다. 성경은 악인을 통렬하게 보여준다. 의인은 없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
죄의능력이 하나님의 능력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짓은 하지 말자.
지역별로 나누면 3개(유럽기준)
- 지중해영성 – 서방교회 영성 영국->미국->우리나라 어거스틴 아우구스티누스
- 동방영성 – 정교회, 그리스와 러시아 정교회가 대표적 -몸을 강조하고 부활강조, 예술적, 예수기도(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우리를 불쌍히여기소서 반복하기), 진선미 추구, 아름다운 하나님,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영성에 대한 책) 톨스토이 – 아름다음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 켈트영성 – 대륙에 속해 있지 않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섬. 켈트족. 대륙에서 밀려난 사람들. 앵글로색슨족이 오면서 웨일즈, 아일랜드 까지 이동한 족속.
- 창조영성을 가장 잘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 아침에 커피 마시면서 하는 기도, 밭 일하면서 하는 기도, 지붕을 고치면서 하는기도, 돼지 교미할 때 올리는 기도, 노동과 일상에 기도가 있다. 창조와 아름다움을 찬미한다.
창조
일상
자연
몸
이런 영성을 추구함.
예수님 들어오기 전의 전통을 다 없애 버린 다른 영성에 비해서 켈트족들은 전통을 계승한다. 자신들의 전통을 기독교와 접목시켜서 가져가려고 노력했다.
2)켈트영성
ad 660 영국 총회에서 서방세계 선교정책을 펼쳐야할지 회의를 하였다. 베드로식 바울식 요한식 기독교가 있다. 베드로식 -교회의 통일, 권위 중요시한다. 바울 – 이성적 교리적, 요한- 인격적인 예수님 감각적인 신비주의(하나님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은 사람) 예수님께 기대서 밥 먹는 요한. 여기서 베드로식으로 하기로 결의. 켈트식의 영성에 대해 버리고 간 것. 결국 켈트는 비주류가 됨. 질서와 통일 권위도 필요하지만 왜 켈트식이 변방화가 되었을까. 안타까워하는 신학자들.
켈트 기도문 근데 20세기에 만든 기도문 : 월요일날의 점심 기도문. 복되도다 복되도다 내 곁에 내 뒤에 내 주변에 진치신 나와 함께 식사하시는 그리스도…
화요일의 기도문 : 기쁨으로 순간에.. 과일 먹을 때 이주민 노동자의 굳은살 박힌 손에 축복을.. (총님 이주민을 캐나다 살 때 얘네는 다 기계로 한다. 농사도 농기계. 짐 옮기기도 한다. 과일농사와 추수는 사람이 해야한다.)
이런게 켈트 영성이다.
일상영성은 이원론을 깨부수기 위한 망치이다.
몸과 영혼은 뗄레야 뗄 수 없는거고. 몸도 중요하다.!!!!
몸은 또 감각과 중요하다.
3)감각영성
이런 감각적인 기쁨에 빠지지 말고, 기독교가 결코 몸의 영성을 평하하지 않습니다. 몸으로 사랑하는게 더 거룩한 행위일 수도 있다.
아가서만 봐도 육적으로 얼마나 기뻐하던가.
14세기 노리치 줄리안 : 우리의 영혼이 감각적으로 만들어 졌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감각에 거하신다.
하나님의 도성( – 어거스틴 신의 도성)이 우리의 감각이고, 예수님이 우리의 감각에 둘러싸여 좌정하고 앉아계신다.
(아… 말 빨라….. 적기 힘들군…)
성령님 이야기
성령님 어디계세요? 우리 마음 속에 계셔요. – 잘못된 가르침. 성령님은 우리 몸에 계세요.
바울이 하는 얘기 – 너희몸은 성령의 전인지 알지 못하느냐. 그 다음에 음란의 죄를 얘기한다.
벗꽃구경 – 시각에 성령님 같이 기뻐하고 계신다. 후각에 성령님 커피냄새 같이 기뻐하고, 연인의 속삭임. 청각에 함께하시는 하나님.
그래야 임마누엘 하나님을 알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감각으로 내려오셨다. 그분을 보고, 냄새를 맡을 수 있고. 그들의 감각들을 충족시켜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감각의 대상이 되어 주셨다.(예수님오심) 요한복음. 장님 눈띄워준 그것 .. 다른 복음보다 감각적이다. 요한복음은… 향유옥합 깨뜨린. 향기가 온방에 가득하더라. 감각적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