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향유와 축제의 영성
일상영성의 왜 향유와 축제로 부터 시작을 했는가?
– 각박한 일상속에서 즐겁게 보내는 시간 마져도 없으면 우리 인생이 무엇인가, 많은 경우 향유과 축제가 정죄하는 분위기.
– 한국교회에 유난히 헌신 충성이 기독교인의 본체처럼 여겨졌다.
잘못된 이원론을 깨뜨리는 작업을 위해서 향유와 축제 영성을 했다.
2강. 향유와 축제의 영성, 창조영성, 켈트 기독교, 감각의 하나님
2강에서 드러났지만 구속영성에 치우쳐져 있었기 때문에 창조영성을 깨닫자. 켈트영성이라는 이 영성. 창조영성을 잘 발전하고 승화시킨 이 영성에 귀를 한 번 기울여 보자. 육체를 폄하 시 하는게 있었는데 이것이 감각을 탄압하고 정죄했는데 이 부분을 회복시키자
3강. 자족과 소박함의 영성
3강에서는 먹고 사는게 이렇게 힘든데 무슨 영성이냐 그래서 자족의 영성 소박함의 영성. 덜 가졌기 때문에 우리가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다.
4강. 정의와 투쟁의 영성
세상에는 자족조차 사치스러운 사람이 너무 많다. 이런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 정의와 투쟁 특별히 억압받는 소수를 위해 하나님의 의분에 초점을 맞춰서 봤다.
그래 인간은 이렇게 잘 산다고 치는데 그럼 근본중심 중심. 생명중심으로 옮겨놔야한다.
5강. 생태적 감수성과 생명의 영성
초록의 영성 5강 까지 이렇게 살펴보았다.
후반부로 오면 좀 더 실제적인 문제를 다룬다.
먹고사는 문제 결혼하고 애를 낳고 키우는 문제
음주가무의 영성, 사랑과 결혼의 영성, 섹스, 배설, 몸의 영성, 출산과 양육의 영성
사람이 향유하고 축제하면 연애 하고
크리스타 볼프 – 시인 독일 ‘나태함은 모든 사랑의 근원이다.’ 놀고 먹어야 사랑이 꽃 핀다.
결혼해도 바쁘면 애가 안태어난다. 축제해야 애가 태어난다.
덴마크에서는 부부를 나라에서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여행을 보내준다.(출산율:1.47 일 때)
아이들이 태어나게 된 계기를 보니 조사해보니 여행가서 애가 생긴경우가 많아서 이런 정책을 한다.
결혼과 아이를 말하기 전에 우리가 얼마나 먹고 살기 힘든가..를 보고 가자…
사는게 너무 힘들다.
일상영성 접근할 때 향유와 축제의 영성으로 접근하는게 아니다. 생활의 신앙 연구하는 사람들이 읽어야할 책
칼라너 가톨릭 개신교에서 욕을 많이 먹는 분인데 anonymous 를 만들었다. 예수를 믿고 신앙고백을 하지 않더라도 이런 사람들이 있고 기독교의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다.
칼라너가 일본에 가서 스님으 지켜보고 ‘스님 당신은 익명의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했더니 스님이 ‘당신도 익명의 불교도입니다.’ 라고 했다고..
칼라너 다원주의자니 하는 말을 들었다. 이 사람은 인간의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저렇게 말한거지. 바울이 한 ‘내가 내 동족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지옥에 가도 좋다…’ 라는 것처럼 미셔널한 마인드 때문에 저런 이론을 만들어 냈다. 다른 의도로 그런게 아니다.
이 분이 쓰신 일상영성을 공부하는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일상 이라는 책이 있다. 일독을 권한다. 가톨릭 용어가 좀 나온다.
분도 소책자 시리즈 중 1호로 나온 책.
첫 페이지에 나오는 이야기. 일상의 신학이라는 것이 일상을 축일(축제하는 날)로 바꿀 수 있다고 여겨서는 안되겠다. 일상은 꿀도 타지 않고 미워하지도 않은 체 견뎌내야한다. 그러면서 심지어 생활신학의 책무는 일은 그대로 일이며, 언제나 그러리라는 그래서 단조롭고 자기포기가 요구하는 것이 일상이다. 심지어 그런 일상에서 주저하고 낙담하는 것은당연할 뿐 아니라 마땅하다.
우리는 왜 향유의 영성을 먼저했나?
왜 일상을 축제로 살아갈 수 없는가?
첫번째는 죄 때문이다. 전도서 9장7절~9절 언제나 일상을 축제로 살아라
1. 죄 때문에
2. 밥 벌이의 괴로움 때문에. – 죄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별개로 볼 필요도 있죠.
권정생 – 빌뱅이 언덕. 한국인이라면 읽어야하는 책이다.
빌뱅이 언덕에서…
인간의 아름다움은 노동에 있다. 놀고 먹는 사람 만큼 추한건 없다. 노동은 가난이 무엇이고 고통이 무엇인지 배우게 한다. 가난하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고 행복을 얻지 못한다.
이 내용은 아멘 하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래서 한 번 살펴보겠다.
몸에 대한 폄하와 영에 대한 우월 이원론. 몸의 욕망 때문에 그런다. 욕망 자체는 잘못된게 아닌데 우리가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안 좋은 방향으로 끌림을 받는다.
몸의 욕망 없이 일상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우리는 먹는 것을 따라 가는 사람을 곱지 않게 보는 시선이 있다.
노숙인 배식을 해보았다. 노숙인들에게 식판에다가 음식을 담아주는데, 김치찌개였어요. 대부분은 퍼주는대로 먹었는데, 어떤 사람은 김치찌개 더 달라. 무생채 다달라. 생수통에 찌개 담아 달라. 이런 분들이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저 분 살아계시구나.’ 이런 걸 느껴야하는데 누가 그러더라 ‘아~ 그냥 주는 대로 처 먹지’ 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당연히 노숙자도 더 먹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총님은 배고픈데 먹을 것을 찾는 건 거룩함을 봐야지, 거기서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역동성을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소설가 김훈 선생.
단언하건데 배가고파서 미군의 초콜렛을 얻어 먹은것은 치욕이 아니다.
먹고 사는 일 때문에 주님 일 못한게 잘못인가?
당당해야해요. 주님 만나서 당당하게 얘기해라. 먹고 사는일 열심히 했다고.
악마가 예수를 유혹할 때 빵으로 유혹했다. 거기다 갔다붙이며 설교하는데 착각말아요.
천국가면 안먹을 것 같아요?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오며 라고 사도신경 외는 사람들이… 천국가도 먹고 쌉니다.
배고프고 목마를 때 하나님께 감사한적 있나요?
만약 없으면 여러분 아직 이 땅에 정착하지 못했다고 감히 말씀드리겠다.
켈트 영성 기도문 중 – 어머니 자궁 속에서 이내 나를 흙으로 빚으시고. 물에대한 갈증과 허기를 감각속에 넣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배고프게 만들었다. 그게 잘못된 것 입니까? 먹고 좋다~ 이게 얼마나 거룩한 겁니까? 잘 먹었으니까 좋다. 이것도 찬양이다. 몸의 욕구야 말로 삶을 누리도록 지음받았다는 확실한 증거이고 참된 감사는 여기서 부터 시작한다.
목마름과 배고픔을 충족할 수 있다는 사실 이걸 노동을 통해 충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사할 수 있다는 것 거기서 시작하자.
우리가 배고프고 목마를 때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했다면 우리 신앙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땅에 뿌리박지 못햇는가..
문제는 먹고 사는게 고통이에요.
아담과 하와 고생 후 먹고 사는 문제가 생겼다. 죽도록 수고하지 않으면 못 먹고 산다. 알베르까뮈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
인간의 실존 – 먹고 사느라 고생하는 것.
먹고 사는 것 만큼 인생에 좋은게 없는데 그것만큼 고생하는 것도 없다.
<사막의 지혜에 나온 이야기>
작은요한(이완? 한 수도사)이 노스승님께 한 말
수도원에서 하루종일 노동만 하고 말이야.. 수도원에서 하루종일 예배하고 이렇지 않는다.
수도원에서 제일 많이 하는 것은 노동이다. 자급자족 하기 위해서 노동을 제일 많이 한다.
맥주빚는 수사. 농사짖는 수사. 너무 바빠서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만든게 3종 기도다.
그 시간 만큼은 기도하자. 아나뱁티스트 전통이지만 하루에 3번 모여서 같이 짧은 예배 드리고..(우리 디톄스 때 낮 묵상, 점심 강의전예배 저녁이 기도)
전 하나님께 줄곧 경배만 드리고 싶습니다. 24시간 365일 경배하고 싶어요. 예배하고.
사막으로 들어갔다. 일주일만에 나왔다. 스승님한테 수도원 다시 들어가겠다고 소리쳤으나 스승님이 밖에 뒀다.
인간이라면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하네.
용서해 주십시오 스승님,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요즘 이중직하는 목회자들. 목회랑 다른 일. 총 본인처럼.
목사님이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해야지. 먹고 사는걸 하면 어떡해.
이걸 멀리하는게 고상하고 거룩한게 아니라. 먹고 사느라 괴로워하고 기뻐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성숙한 신앙이다. 이건 목회자 신학자로 이것은 양보 못한다.
작은요한은 영적인 절정에만 머물려고 했다. 영적인 기쁨과 절정. 24시간 예배만 하고 싶어요.
노동과 밥벌이 고달프고 힘든겁니다.
자기가 일해서 밥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청소부가 자신의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 아무리 사경회 수련회에서 은혜받은 이 영발(이런 표현 이해하달라) 이거 얼마나 가나? 일주일 한 달? 얼마나 가나.
왜 예수안믿는 사람들이 일상을 잘 견디지? 기대감이 낮아.
예수믿는 사람들은 기대치가 너무 높아.
직장을 복음화 시키고, 우리 회사의 방향을 선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자리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그냥 정직하게 땀흘려 월급 받으세요. 그것부터 하고 다른 걸 하세요.
그 다음에 고민해라. 그걸 견뎌내고 다른 걸 해봐라.
‘직장생활하면서 월요일날마다 지옥처럼 가기 싫은 직장을 향해 가는거. 상사앞에 깨지고 화장실에서 울고. 이렇게 살면서 사는거 이게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걸음이다. ‘
미화시키려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는 순간들이 있다. 기도와 말씀에서.
이 은혜를 쏟지 않고 일상에서 간직해야합니다. ==> 이게 안되면 나를 정죄한다. 이러니 나는 성령충만하지 않지.
우리가 성령충만해지면 맨날 하는 집안일도 즐겁고 직장에서도 야근해 이러면 할렐루야 하는 사람이 있다. 100% 부정하진 않지만 우리는 변화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야하는 사람이다.
3명만 데리고 갔다. 옷이 하얘지니까… 너무 신기한거야. 모세와 엘리야가 있어. 베드로가 너무 좋아해. 여기서 살겠어요. 했더니
예수님이 내려가자…
예수님께서 거기서 뭐했나? 십자가 못 막힐 일 의논하고 있었던 거다. 땅에선 이해할 사람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영적절정을 맛볼 시간 필요하다. 은혜 받을 자리 있으면 나도 가라고 한다. 근데 거기 갔다오면 기도원에 있었던 것처럼
붕 떠서 일상을 살 수 있을거라 생각해요?
그게 성령충만인가요? 아닙니다.
우린 변화산에 계속 못 있습니다. 내려와야합니다.
영적절정에 머무르려고 하는게 우상숭배이다. 잘못된 신앙이고 성령충만 = 영적충만 이거 아니다.
그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정죄하고 죄책감에 빠진다. 그거 정상이다. 지극히 정상이다. 그런날 일년 중 며칠 안된다. 일년 내내 그렇게 살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당신 이미 성령충만해서 살고있다.
성령충만에 대한 이 잘못된 생각을 깨뜨리지 않으면 노동을 영원히 구원받지 못한다. 노동은 근본적으로 고통이다. 괴로움이고.
게리 토마스 –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 => 보수주의자
나는 영적 체험의 욕구도 식욕 물욕 성욕 처럼 탐욕화 할 수 있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영적 절정에 대한 갈망을 절제해야한다. 그래야 우리 존재의 다른 부분들이 개발될 수 있다.
애 키우면서 애 한테 짜증내 -> 내가 믿음이 없어서 그렇지. 아니에요. 운동을 안해서 그래요. 하루에 한시간씩 운동하면 한달이면 애한테 짜증 안낸다.
모든 걸 영적 절정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부족한거야. 이런게 아니다.
니체가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이나 자신의 작품을 지루하게 느끼게 할 용기가 없는 사람은 예술가든 학자든 일류가 아니라고
자신의 삶을 메마르고 건조하다는걸 받아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그 그리스도인이 일류는 아니야.
내 삶이 각박하고 건조하다는거 이걸 받아들일수 있어야한다.
제가 지금까지 드린 얘기는 이거에요.
건조함 메마름 팍팍함. 그대로 끌어 안는 것이 진정한 영성이다.
faithful 하나님께서 나에게 충실하시다. 여기 온전히 임재해계시다. 전능하심으로.
몸만 와있고 마음이 딴데 가 있지 않는다.
어떻게 닮아 있느냐. 고통스러울 때 충분히 고통스러워하고 울 때 충분히 울고
이게 진정한 영성의 시작이에요.
‘사소한거에 일희일비 하는거 진정으로 그러는 것. 온전히 충만하게 할 수 있으면 그거야 말로 최고의 신앙이다.‘
먹고 사는 고통에 대한 부분들 쉽지 않다.
우리 예수님 얘기를 해보면,
이땅에서 십자가 고통을 지심으로 알고 있지만 누구보다도 향유와 영성을 잘 누리신 분.
그 분은 나는 곧 죽는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 전에 식사했다. 우리가 사는게 지옥같고 괴롭지만 그걸 끌어 안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 할 줄 아는 것.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못 지고 가셨다. 그러다가 유월절 축하 명절 때 온 유대인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라는 사람이 십자가를 대신 졌다.
성경을 그냥 보면 안된다.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 지고 가시는데 자기 십자가를 끝까지 못지고 가셨다.
우리한테 자기는 자기 십자가 지고 오라하시는 데, 예수님도 결국 시몬의 도움이 있었다. 공동체로 서로 도움을 주며 살 필요가 있다.
포도주 마취약 타서 주는데 거부하심. 고통과 수치를 잊으라고 줬는데.. 예수님이 거절했다.
이 지점이 참. 그러면서 목마르다. 로마병사가 신포도주 드렸다. 애초에 몰약을 탄 포도주는 안드셨는데..
어쨌든 당신은 지고갈 십자가를 지고 갔다. 우리에게 때론 신포도주가 필요하다.
근데 마취제는 아닌거야. -> 영적절정에 거하고 있는 거라 생각한다.
[중략…]
예수님 -> 내일일을 염려하지 마라. 내일이 대신 염려해줄거야. 걱정하지마 <- 이런 뜻이다.
내가 오늘 나에게 주어진 수고. 고생.
이걸 다 감당한 사람은 쉴 수 있다.
평생 쌓아놔야만 마음이 편한 사람은 쉼이 없다. 오늘날 다들 먹고 살기 힘든 이 시대에 예수 전하는 방법. 힘들수록 먹고 마시면서 즐거워하라. 힘들 수록 쉴줄 아는 것.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삶으로 드러내는것.
- 히브리원어에 보면 7일째까지 일하셨다. 메누하 -고요함, 쉼, 축전 이런 의미를 갖고 있다.
안식은 거룩하다. 구별돼있다.
실존적인 거룩함은. 자기개발 해야지. 그런데 이 가운데서 구별된 시간을 갖는 것. 쉼을 누릴 줄 아는게 그리스도인의 표지이다. 개역개정에는 이렇게 표현됐다.
‘하나님도 한숨을 돌리셨다.‘
안식일 -> 안식년 -> 희년
침묵의 세계 – 살아있는 침묵을 가지지 않은 도시는 결국 멸망으로 침묵을 가지게 된다.
[중략]
먹고 살게 넉넉한데 더 가지려고 하는 것은 탐욕이지만, 먹고 살려고 일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